무도/격투기 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는 그만큼 많은 용품점들도 존재합니다. 그 중에서도 3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무도격투기용품점의 대표적인 브랜드가 바로 ISAMI(이사미)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오사카나 나고야 등 지방을 근거지로 둔 마샬월드나 코부도우(공무당) 등이 존재하고, 특히 최근 몇년 사이에는 격투기 용품을 주축으로 한 보디메이커나 피트니스숍 등 신흥 브랜드들이 좀 더 싼 가격의 제품을 내놓으며 급성장을 하는 등 경쟁을 펼치고 있지만 역시 품목의 다양성과 오랜 역사를 통해 극진회관, 쇼린지켐포, 니폰켐포 등 굵직굵직한 단체들의 공인용품을 생산해오면서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는 이사미의 아성을 뛰어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경쟁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각자의 영역을 키워나가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적합합니다. 우선 이사미가 오사카나 나고야, 요코하마 등 각 지역마다 대리점 및 지점을 내고 있기는 하지만, 지역문화나 상권이 발달한 일본의 특성상 마샬월드나 코부도우는 현지의 터줏대감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고 있고요. 이사미가 전통무도구부터 트레이닝용품 및 시설장비의 비율이 거의 같은 비중으로 고른 분포를 보이고 있다면, 보디메이커는 종합격투기 및 트레이닝 용품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피트니스숍 또한 브라질유술 도복이나 일부 영상매체를 제외하면 격투기 의류 및 트레이닝용품의 비중이 높은 편인데, 특히 매장과 연결된 체육관을 두고 격투기 선수 및 팀들에게 장소를 대여해주는 등 적극적인 마케팅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최근의 업종 확대이고 원래는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웨이트 트레이닝 용품이나 시설 장비, 그리고 보조식품 등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일본어로 '용기'를 뜻하는 말이기도 한 ISAMI의 브랜드 로고는 그래서 날랠 勇 자를 형상화한 이미지다.
사진은 일본 토쿄 스이도바시 지역에 위치한 ISAMI 쇼부도우 지점, 일본 격투기의 성지라 할 수 있는
토쿄돔과 코라쿠엔홀 부근인 만큼 이 근방에는 이외에도 피트니스숍 등 격투기용품점이 많이 밀집해있다.

이런 이사미가 지난 주 서울 신당동(이라고는 하지만 연상되는 떡볶이 골목과는 거리가 멀고... 장충체육관 근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상세한 위치는 이사미 서울 홈페이지 http://www.isami-seoul.com 에서 확인하시길...)에 한국지사 겸 서울매장을 오픈하며 첫 해외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저는 일본에 출장가있는 동안 현지에서 한 관계자를 통해 이 소식을 들었는데, 사실 처음엔 좀 의아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과거에 일본의 몇몇 업체가 한국 시장 진출을 꾀했다가 수요와 가격 사이의 괴리를 깨지 못하고 실패한 바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필 요즘처럼 원화 대비 엔화 가격이 미친 듯이 치솟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에 매장을 낸다? 더구나 이사미라고 하면 일본 브랜드 중에서도 고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대신 가격이 높은 편에 속하는 브랜드로 익히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더욱 한국 시장의 사정과는 맞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죠. (뭐... 정말로 '헉' 소리 나게 비싼 가격을 자랑하는 최강의 브랜드 몇이 따로 있긴 합니다만...-_-)

하지만 며칠 전 실제로 매장을 방문하고나서 그 생각이 확 바뀌었습니다. 오히려 힘겹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기존 국내 용품업체들이 한층 바짝 더 긴장해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이렇게 생각이 바뀐 이유는 "우와, 진짜 이 가격에 판단 말이야?" 싶을 정도로 싼 가격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제품들이 현재의 환율이 아닌 작년 환율과 비교해봐도 일본에서 살 때 가격보다 싸게 팔리고 있더군요. 대충 어림짐작으로 봐도 중국이나 대만, 태국, 파키스탄 등에서 생산해서 들여오는 물건들은 일본판매가의 1/3 정도, 일본이나 브라질, 미국산 제품의 경우 일부 프리미엄 공인용품이나 수작업이 들어가는 도복을 제외하고는 1/2 정도의 가격에 팔리고 있었습니다. 과거 일본업체들의 패인이었던 보수적인 가격정책을 과감히 깨고 '손님이 살 수 있는 가격으로 판다'는 유연한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물론 이 가격은 어디까지나 일본 가격을 고려해봤을 때 파격적일 뿐, 비슷한 국내 제품들과 비교해봤을 때는 큰 차이가 없거나 그래도 역시 비싸다 싶은 가격이긴 합니다. 예컨대 면 소재로 된 다리보호대(발등정강이보호대)의 경우 1만6천원으로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던 같은 형태의 제품들과 5천원 이상 가격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원래 가라테나 아이키도, 우슈 등 국내에서도 친숙한 무도 종목들의 도복 및 용품을 생산하는 데에서 시작했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극진회관 등의 공인용품을 생산했던 만큼 국내에 알려진 일본  무도격투기 브랜드 중 이사미에 대한 인지도는 압도적으로 높은 편이고 실제로 그 품질 또한 자타가 공인하는 신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약간의 절대가격 차가 있다 하더라도 '이사미 제품이 이 가격이라면 이걸 사는 게 낫다'라는 심리가 충분히 형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내에 '비슷한 제품'이 있을 때의 경우입니다.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현재 이사미에서 판매하고 있는 품목은 대충 둘러보기만 해도 이런 것도 파는구나 싶을 정도로 다양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상품이 출시됩니다. 서울 지점에도 상당히 많은 수의 품목이 입하되어 있는데, 이미 일본에서 안정적인 시장과 제품군이 형성된 상황에서 서울지점에 일부 물품을 공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제품을 저가에 공급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죠. 그렇다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큰 돈 차이 없이 더 많은 선택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 동안 국내에서는 수요가 적다는 이유로 생산이나 수입이 이뤄지지 않거나 너무 비싸게 팔렸던 제품들을 싼 가격으로 보유하고 있는 이사미에 눈길을 돌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안면타격스파링이나 경기를 위한 안면보호투명헤드기어의 경우 그동안 은근히 많은 구매 욕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저가형 스포츠찬바라용 제품이 아니면 비싼 수입제품을 최소 8만원에서 15만원 가까운 가격에 구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이사미에서는 4종류의 안면보호용 투명헤드기어를 3만8천원에서부터 12만5천원까지의 다양한 가격대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사실 3종류는 모두 5만원 이하고, 일본제 수퍼세이프만 12만5천원입니다. -_- 하지만 이것도 일본 현지가격 16,800엔을 생각하면 참 착한 가격이라는... ) 래시가드나 파이트팬츠, 오픈핑거글러브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해외에 나가서, 혹은 나갔다 오는 사람들을 통해서 어렵게 구했던 물건들이 매장에 종류별로 '깔려'있으면 가격은 둘째치고서라도 우선 보는 눈이 즐거워서라도 자주 찾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닐까요?

마우스피스만 해도 3천원 짜리 싸구려 아니면 구경하기도 힘든 국내용품업체와 달리
다양한 디자인과 성능, 가격대를 고를 수 있고 케이스 등과 같은 액세서리까지 갖추고 있다.


이처럼 이사미라는 막강한 브랜드의 출현은 소비자 입장에서는 참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국내 용품업계에는 어쩌면 큰 타격을 주는 사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상 그동안 국내 용품업계는 태권도, 합기도, 해동검도 등 일부 종목에 치우친 시장 규모 때문에 하고 싶어도 상품 개발이나 수입을 못하고 소비자가 구매하려는 가격에 맞추기 위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저품질의 자재를 사용하는 등 생산 원가를 낮추는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국내 대다수 용품업체 관계자들을 만나 보면 일부 대형협회에 납품하는 업체가 아닌 이상 '내수 시장에서는 품질보다 그저 싸게 만들어 파는 것이 최고다. 좋게 만들어 봐야 비싸면 도장 관장들이 안 산다.'라는 인식이 뿌리깊게 박혀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사미에서 판매하는 제품 중 파키스탄 공장에서 생산하는 백글러브가 있습니다. 실제 염소가죽으로 만들어졌고 디자인도 깔끔하고 색상도 검정/빨강/파랑/노랑 등 다양합니다. 손에 땀이 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손바닥 부분이 개방되어 있고 손가락을 뺄 수도 있게 되어있어 잡기 연습까지 할 수 있는 아이디어도 좋습니다. 일본가격이 2300엔(소가죽 제품은 4300엔), 현재 국내 판매 가격은 1만9천6백원인데, 이 가격에 살 수 있는 기존 국내 제품은 저품질의 인조가죽 심지어는 비닐 소재로 만들어진 것으로 디자인이나 착용감도 썩 좋지 않고 수명도 짧은 것이 현실입니다. 존재를 모른다면 모를까, 돈 2만원에 천연가죽 글러브를 살 수 있다는 걸 안다면 앞으로 누가 그런 제품을 사려고 할까요?

사실 제가 2년 전 이 업체 제품(백글러브는 아니고 오픈핑거글러브였는데, 소가죽에 부분 마감까지 꼼꼼히 처리된 제품이 당시 환율로 5만원도 안 하는 착한 가격이었습니다.)을 보고 가격 대비 품질이 너무 좋아 한 국내 업체에 수입을 건의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기본적으로 수입가가 비싸기 때문에 저가 자재를 이용해서 더 싸게 똑같이 만들어야 팔릴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조차도 수요가 없을 듯 하다는 이유로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죠. 이런 식으로 해서 국내에서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상품 목록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오르는 원자재 가격이나 인건비에 생산 단가를 맞추기 위해 품질은 더 나빠지는, 제자리 걸음도 아닌 퇴보를 거듭해왔습니다. 물론 경제 불황 등 그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언제나 목마른 상태였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런 수요를 채워준다는 명목 하에 수입가에 큰 마진을 붙여 판매하는 업자들도 있었죠. 실제로 그동안 국내에서 10만원이 넘는 가격에 팔렸던 태국제 모 브랜드의 밸리패드(복부 미트)의 경우, 이사미 서울점에서는 5만5천원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같은 브랜드의 킥미트나 글러브 등도 모두 1~2만원 정도의 가격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 브랜드 제품을 소비자가 어디에서 구매할 지는 자명한 일입니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그나마 의욕을 가지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보고자 어려움을 무릅쓰고 상품개발에 노력하는 신흥주자들입니다. 사실 이마시 서울점의 물품 구성은 일본과는 달리 격투기용품, 그것도 종합격투기나 그래플링 쪽에 상당히 치우쳐있습니다. 그것은 기존 무도구 시장은 이미 한국에서도 상당히 고착화되어있기 때문에 경쟁력을 갖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격투기 용품 쪽은 위에서 언급한 이유로 이렇다할 경쟁자가 없고, 최근 몇년 사이 일부 젊은 업체들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조금씩 제품을 개발해왔는데요. 하지만 경험 부족으로 인해 기껏 개발한 제품이 소비자 요구에 미치지 못해 팔리지 않는다거나, 그나마 잘 나온 것도 절대적인 수요 부족 또는 유통 및 홍보 능력의 한계 등으로 인해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고충을 겪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결과가 노장 업체들에게는 '그것 봐, 역시 그렇지'라며 보수적 성향을 굳히는 악순환을 낳았고요.) 이런 상황에서 이사미라는 거대강자의 등장은 이제 겨우 자라나려 했던 국내 격투기용품업계의 싹을 다시금 말리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연히 팀윤 소속 선수들과 마주쳤다. 실제로 매장은 주로 일본을 오갔던 선수들이나 이사미
브랜드에 익숙한 가라테 수련자 등이 많이 찾는다고. 이사미는 코리안탑팀과 팀포마, 팀윤 등의
후원도 하고 있는데, 이런 수요가 일반인들에게까지 이어질지는 좀 더 두고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상황이 그렇게 무조건 비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미 서울점은 오픈한지 이제 겨우 열흘 정도가 지났을 뿐이고 매장 분위기는 사실 조용한 편이라고 합니다. 오픈 행사 기간이 지나면 각 품목별로 조금씩은 가격을 상향조정할 생각도 있다고 하니 앞으로 실제 수요가 얼마나 있을 지는 좀 더 두고봐야 할 듯 합니다.

뭐 그렇다고 국내업체들을 위해 이사미가 결국 실패하고 한국에서 물러나길 바란다는 얘기는 아니구요. ^^; 사실 저는 오히려 이사미가 성공하는 것이 한국 시장 활성화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국내 업계의 고충은 한마디로 '검증되지 않은 시장에의 도전'이 두렵고 어렵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이사미가 다양한 품질과 품목 그리고 현실적인 가격정책으로 뛰어듬으로써 과연 어느 정도의 시장이 한국에 형성될 수 있고 소비자들이 정확히 어떤 수요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게 됐습니다. 

따라서 만약 이사미의 한국 진출이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기존의 보수적 성향을 띠고 있던 업체들도 시장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신흥업체들은 최소한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시장에 뛰어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이사미를 통해 경쟁력을 가진 새로운 개발 상품의 납품이나 일본 시장에의 진출도 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역시 제가 과거 개발에 참여했으나 판로 개척이 불투명해서 생산에 들어가지 못했던 제품이 지금 이사미 로고를 달고 일본과 한국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더군요. 지난 주 일본에 갔다가 그 제품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ㅎㅎ) 부디 이사미의 한국 진출이 여러가지 의미로 침체된 한국 시장에 경종을 울리고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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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류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