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 특히 '본 시리즈'를 기폭점으로 헐리우드 액션 영화 격투 씬의 성격이 크게 바뀌었다. 예전에는 주로 전통적인 무술이나 격투기(태권도, 가라테, 합기도, 쿵푸 그리고 프로레슬링)를 기반으로 크고 화려한 펀치와 발차기를 시원시원하고 사이좋게(?) 주고 받는 '합'들이 주를 이뤘다면, 최근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은 보다 섬세하고 스피디한 손 동작 위주로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면서 빠르게 제압한다. 그런가 하면 가까운 거리에서 나이프나 권총, 맨손 격투가 복잡하게 뒤섞인 합도 많이 보인다. 

 

미디어의 빠른 호흡에 익숙한 현시대의 관객은 당연히 이런 액션 씬에도 열광한다. 게다가 여기에 사용된 기술들이 군대나 특수요원들이 사용하는 무술에서 파생되었다는 정보를 접한 이후로 '진짜 실전적인 동작'이라고도 생각하게 되었고, 이런 무술들을 동경하고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이런 조류는 최근 한국 액션영화에도 반영되어 '아저씨'에서는 인도네시아 무술인 시라트가, '회사원'에서는 러시아 특수부대 무술로 알려진 시스테마가 액션 씬에 접목됐다. 


또, 이번 주에 개봉한 톰 크루즈 주연 영화 '잭 리처'에서는 케이시라는 생소한 이름의 무술이 사용되었다. 이에 맞춰 최근 영화 속 액션의 기반이 되고 있는 무술들에 대해 알아볼까 한다.




먼저 이스라엘 군대격투술로 시작된 '크라브마가'가 있다. 흔히 국내에서는 '본' 시리즈에서 크라브마가가 쓰였다고 알려져있지만, 크라브마가를 확실히 전면에 내세웠고 그 시스템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건 제니퍼 로페즈 주연의 '이너프'라는 영화다. (상단 영상 참조) 


최근 타무술의 기술을 흡수한 지도자들이 많아지면서 마치 크라브마가의 기술이나 커리큘럼이 복잡하고 화려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크라브마가의 가장 큰 전술적 특징이자 최고의 장점은 '단순함'에 있다. 누군가의 공격 또는 공격 의도를 눈치챈 순간 반사적으로 상대의 급소 부위를 향한 공격을 시작한다. 그 공격은 단타도 아니고 복잡한 컴비네이션도 아닌, 쉽고 간결한 동작의 반복이다. 


예를 들면 주먹을 휘두르는 상대의 팔과 어깨를 방어한 후에 무릎으로 상대의 복부를 계속해서 올려찬다. 언제까지?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일단 공격을 시작했으면 (상대가 항복할 때까지) 때린 데 또 때리는 것'이 크라브마가다. 징벌적 방위가 허용되는 미국 등지에서 크라브마가가 일반인이나 여성들을 위한 호신술로 크게 각광을 받으며 빠르게 보급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다. 



 
 

한편 '본' 시리즈나 '테이큰' 시리즈, 그리고 그에 앞서 '헌티드'라는 영화에서 사용됐던 무술은 통칭 '칼리'라고 불리는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수련되는 동남아 무술들이다. 이 계통의 무술들은 에스크리마, 아르니스라고도 불리는데 이 명칭들은 과거 스페인 식민지 시절에 생긴 것이라고 한다. ('에스크리마'는 스페인어로 '칼싸움'이라는 뜻이고, '아르니스'는 가죽으로 된 보호장비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칼리 계열 무술의 특징은 '(핸드/암) 트래핑'이라는 동작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상대의 손이나 무기를 쳐내거나 낚아채는 것 또는 얽어 묶고 꺾는 것'을 뜻한다. 기본적으로 상대의 무기를 방어하고 뺏기 위한 동작이라고 할 수 있는 트래핑은 맨손은 물론이고 나이프나 스틱을 들었을 때도 같은 원리와 흐름으로 적용되며, 이를 통해 상대의 손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타격에서부터 관절기, 메치기까지 여러가지 종류의 반격이 연결되기 때문에 익혀두면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그 동작이 꽤 복잡하고 여러가지 패턴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 초심자들은 이 트래핑을 몸에 익히기 위한 패턴 연습을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보통 '플로우 드릴(흐름 연습)'이라고 부르는 이 동작들은 언뜻 보기엔 영춘권의 치사오와도 비슷한데, 이 드릴 패턴을 어떻게 나누고 정리하느냐에 따라 여러 종류의 스타일(유파)가 생겨났다고 이해하면 된다.


영화에서 보이는 화려한 손 동작이 이어지는 액션 장면은 대부분 이 플로우 드릴을 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테이큰 2'의 말미 격투 씬에서 잠깐이지만 기초적인 드릴을 거의 그대로 보여주니 궁금한 사람들은 참고 바란다. 



 


그런가 하면 '아저씨'에서 원빈이 구사했던 인도네시아 발상의 '시라트(실랏)' 역시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지역 전반에서 수련되고 있는 무술인데, 칼리와 비슷한 부분도 많지만 맨손무술 성격이 강해 칼리에 비하면 큰 동작과 발차기가 많은 편이다. 때문에 얼핏 '옹박'으로 익숙해진 무에보란(고류 스타일의 무에타이)과 유사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자세를 급격히 낮추거나 넘어졌을 때 서있는 상대에 대항해 앉아있는 상태에서 또는 구르면서 상대의 하체를 공격하는 '하리마우'라는 지당 기술 영역이 발달해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시라트를 보다 본격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영화는 작년 개봉했던 '레이드'를 만든 가레스 에반스 감독의 이전 작품 '메란타우'다. 가레스 감독은 영국인인데 동양 무술의 팬이어서 인도네시아에서 두 편의 영화를 촬영했으며, 주인공 역시 이코 유와이스라는 시라트 전문 수련자가 맡고 있다. '메란타우'는 시라트를 수련하던 청년이 여행 중 도시에 들어오면서 악당들과 싸우게 된다는 스토리로, 영화 도입부에 꽤 긴 시간을 들여 시라트의 형(품새) 연무를 보여준다. (여러가지 면에서 '옹박'과 유사하다 ^^) 상단 영상은 메란타우 상영 당시 이코 유와이스가 보여준 실제 시라트 액션 시범이다. 

 



최근 헐리우드에서는 스페인 발상의 신생무술 '케이시 파이팅 메소드 (약칭 KFM 또는 케이시)'도 인기다. '미션 임파서블 3', '배트맨 비긴즈' 그리고 이번에 개봉한 '잭 리처' 등에서 사용된 이 무술은 우선 독특한 팔꿈치 쓰임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이 싸울 때 양 팔꿈치로 머리를 감싸듯이 하고 공방을 펼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팔꿈치 쓰임은 케이시의 기본 전술 특징에서에 기인한다. 일단 상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머리를 보호하며 (이를 위해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팔꿈치를 세운다) 단숨에 상대의 가슴 또는 허리 쪽으로 파고들어 초근접 상태를  만든 후 공격에 들어가는 것이 케이시의 가장 기본적인 전투 방식이다. 따라서 사용하는 기술도 근접 상태에서  쓰기 좋은 팔꿈치나 무릎, 어깨, 박치기 등을 이용해 상대의 팔 다리 오금에 충격을 주거나 가슴, 얼굴 등을 잡고 넘어트리는 위주가 된다. (칼리가 영춘권과 유사하다면 케이시는 심의권 타입인 셈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영화 '회사원'에 사용된 러시아 무술 '시스테마'는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진 않은 무술이다. 최근 인터넷을 통해 관련 영상이 소개되면서 국내에서도 조금씩 관심을 받기 시작했는데, 특히 몸의 힘을 완전히 빼고 흐느적거리는 듯한 움직임 속에 상대가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굴러다니거나 슬쩍 손만 닿은 것 같은데 주저앉는 등의 시범 영상이 많아 '러시아판 신비의 무술'처럼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이런 모습은 얼핏 합기계 무도의 연무 같아 보여 실제로도 주로 합기계 무도 연구가들이 공통점을 찾기 위해 많은 관심을 보여왔고, AIKI EXPO 같은 행사에 시스테마 지도자들이 초대되곤 했다. 

 
하지만 정작 시스테마 자체는 합기 같은 추상적 개념보다는 인체 구조나 운동 역학, 생리학에 대한 철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군대용 무술임(과거 스페츠나츠 대원들이 익혔다고 함)을 강조한다. 사실 시스테마에서 실제로 격투에서 사용하는 기술 형태 자체는 콤바트삼보를 위시해 기존 무술 동작들과 겹치는 부분도 많다. 다만 그 동작들이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자기 몸에 저항이 돌아오는 것 또한 최소화시키면서 자신의 공격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가장 적확한 각도와 힘, 타이밍을 조건반사적으로 구사하는 것이 시스테마가 추구하는 바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수련생들은 감각 발달 훈련을 많이 하는데, 먼저 책상이나 의자 등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넓은 방 안을 눈을 감고 천천히 걸으며 움직이지 않는 사물을 느껴보는 것에서 시작해, 공격해오는 사람을 상대로 움직이는 힘에 저항하지 않고 흐름을 따라 회피하는데 처음에는 천천히 상대의 움직임을 보면서 실시하고 익숙해지면 속도를 올리거나 눈을 가리고 실시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시스테마 영상은 바로 이런 감각 훈련 장면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특성 상 영화에서 시스테마의 특징을 표현하기는 더욱 힘들었으리라 생각하는데, 아래에 실제 시스테마 훈련 장면들을 많이 담아놓은 영상을 첨부하니 참고바란다.

 




지금까지 최근 무술 격투 팬들의 관심을 모았던 영화 속 무술들의 실상(?)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이렇게 영화에서 소개된 무술은 아무래도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배워보려는 사람들도 많아지게 마련이다. 크라브마가나 시스테마, 칼리(아르니스) 등은 국내에도 협회나 도장이 있어 본인이 발품을 팔 의지만 있다면 배울 수 있는 무술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개중에는 이런 무술들에 대해 이런저런 환상을 품게 되는 경우도 있다. 생각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니 어떤 무술이 이렇게 싸우던데 역시 그 무술이 최고인 것 같다는 식의 얘기를 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영화 속 액션은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액션'이란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무술을 소개하기 위한 영화가 아닌 이상 대부분 장면들은 여러가지 스타일의 움직임이 뒤섞이기 마련이고, 주소재가 되는 무술이 있다 하더라도 그 무술의 진짜 형태나 전체적인 성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다 못해 과장이라도 하게 되어있다.)

그러니 영화 속 무술은 영화 속 무술로서 즐겨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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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류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