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무에타이 도장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좁고 땀 냄새 나는 링과 험상궂은 사내들이 팬티 차림으로 기괴한 기합 소리와 함께 샌드백과 미트를 쳐대는 거친 이미지를 연상합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깨끗한 시설과 여성들을 위한 다이어트 프로그램으로 무에타이를 수련하는 여성도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무에타이 명문 삼산이글체육관(관장 이기섭)과 구심무에타이캠프(관장 오성일)이 몇 개월 전 합작 설립한 구심삼산이글무에타이캠프 역시 그런 곳입니다. 제가 방문했던 날도 평일 저녁 8시 30분에 시작해 1시간 남짓되는 시간 동안 진행된 단체 수련에서 여성 관원이 무려 9명, 전체 수련 인원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수련은 기존의 선수 훈련의 체계를 따라갔던 형태가 아닌, 남녀노소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따라할 수 있으며 여러 사람이 다 함께 진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짜여져 있었습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스트레칭과 달리기를 기본으로 한 다양한 유산소운동, 스텝을 동반한 기본 동작들의 반복 연습으로 30분 정도 워밍업을 한 후, 두 줄로 마주본 상태에서 시행하는 기본 기술 연습과 그날의 테마 기술의 집중 연습으로 본운동이 진행되고, 다시 간단한 체력 보강운동으로 마무리되는 형태입니다.
또한 태국의 전통무예임을 강조하며 (오성일 관장은 전통식 무에타이인 무에보란을 국내에 전파하고 있는 몇 안되는 지도자이기도 함.) 예절과 무도성 또한 강조하고 있어, 마치 일본 전통무도 도장들처럼 정좌 상태에서의 예절로 수련을 시작하고 끝내는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단체 수련 후에는 TV가 설치된 러닝머신과 스쿼트렉 등 웨이트 시설이 구비된 별도의 피트니스룸에서 개인 운동을 할 수도 있어 따로 피트니스센터를 다닐 필요가 없겠더군요. 확실히 이 정도면 여성 관원이 많을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곳을 찾은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이런 좋은 환경이 갖춰지기 전부터 무에타이 자체의 매력에 빠져 꾸준히 수련을 해온, 그것도 50대 주부이자 직장인이기도 한 김경자씨를 만나는 것이었죠. 현재 54세(58년생)인 김경자씨는 이날 단체 수련에서도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고, 다른 여성관원들을 이끄는 역할 역시 하고 있었습니다.
08년에 무에타이를 시작해 현재 2단을 보유하고 있다는 김경자씨는 무엇보다 무에타이 수련이 즐거워, 매일 수련을 한다고 했습니다. 가정주부가 저녁 시간에 매일 운동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텐데, 심지어 김경자씨는 지금도 사무직에서 일하고 있는 직장 여성이며 요양원에 모신 어머니를 돌보는 일까지 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이제는 자식들이 다 자라서 며느리도 있고, 집에서 역할은 많지 않은 편이라 저녁 시간에 여유가 있는 편이예요. 사무실에서 퇴근하면 어머니가 계시는 요양원에 들렀다가 도장에 와서 운동하고 귀가하는 게 일과가 됐죠. 사실 제가 우울증이 있었는데, 무에타이를 시작한 후 많이 좋아져서 가족들도 응원해주고 있어요."
재미있는 것은 김경자씨의 딸과 사위가 태권도 도장을 운영한다는 사실입니다. 학생 시절에는 배구를 하기도 했었다는 김경자씨는 최근까지 여느 아주머니들처럼 수영을 하기도 했었다는데, 어쩌다 무에타이를 시작하게 됐는지 물어봤습니다.
"좀 더 활동적인 운동을 하고 싶어 딸과 사위에게 태권도를 가르쳐달라고 했는데 '어머님을 어린이들 가르치듯 가르치기가 어렵다'며 난처해 하더라고요. 그런데 사무실에서 바로 마주보이는 곳에 무에타이 도장(구 삼산이글)이 있었어요. 그래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딸애 도장에서 영화 '옹박'을 봤어요. 그걸 보고 결심했죠."
'옹박'을 보고 무에타이 도장을 찾았다면, 아무래도 영화에서 봤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을 겁니다. 또, 아무래도 과격한 운동이기 때문에 도중에 그만둘 수도 있지 않았을까 했는데요. 김경자씨는 오히려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네, 옹박하고는 좀 다르더라고요. ㅎ 하지만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진 않아서 기대감은 충족했습니다. 제가 학생 시절에 배구를 했었는데, 전신운동이란 면에서 비슷하지만 무에타이는 팔꿈치나 무릎 같은 관절 부위도 사용하니까 신선하고 더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주변에서도 다치지 않느냐는 걱정을 많이 하는데, 스트레칭 충분히 하고 관장님이 시키는 대로 잘 따르니까 다치지도 않고 즐겁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무에타이의 매력에 푹 빠져 수련을 이어온 김경자씨는 현재 2단을 따기까지 했다는데요. 무에타이 수련 후 특별히 무엇이 달라졌다고 느끼는지 물어봤습니다.
"무엇보다 우울증을 극복했습니다. 지금은 활력이 넘쳐요. 그리고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는데 순발력이 좋아졌다는 걸 느낍니다. 누가 갑자기 튀어나와도 빠르게 반응할 수 있더라고요. 다리 근육도 강해져서 체력 테스트(구심삼산이글캠프에서는 매달 정기적으로 체력 테스트를 실시한다) 하면 젊은 아가씨들보다 제가 더 기록이 좋습니다."
그래도 남자들 사이에서 여자로서, 그리고 50대의 나이로 무에타이를 수련하는데 한계를 느끼는 부분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김경자씨는 그런 부분을 통해 오히려 앞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목표를 정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여자가 없었어요. 요즘은 스파링을 잘 안 하는데, 예전에는 그래서 중학생 남자 애들과 스파링을 하곤 했죠. 물론 나이가 있으니 젊은 친구들처럼은 못합니다. 그래도 밖에서 뭔가 위험한 상황이 닥쳐도 당황하지 않고 뭔가 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물론 그런 일은 안 겪는 게 사실 최선이겠죠. 이런 자신감을 다른 여성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어요.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무에타이 도장을 차리는 게 지금 제 꿈입니다. 아직 국내에는 여성 관장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여자도 할 수 있다는 것, 나이 먹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막연히 격투기를 두려워하고 여자가 하기는 힘든 운동으로 생각하고, 또 실제로 남성 지도자들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여성의 입장을 이해하고 수용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김경자씨는 하나의 좋은 롤모델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김경자씨를 통해 더 많은 여성 분들이 무에타이, 그리고 격투기의 매력을 접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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