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1글로벌이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2008년 초 종합격투기의 월드컵이라고 할 수 있는 범세계적 리그의 형성과 그를 통한 차세대 격투스타의 발굴을 표방하며 출범한 단체죠. 공동대표에는 격투 황제 예멜리아넨코 표도르 그리고 바딤 핀켈슈타인이라는 인물이 함께 하고 있고, 우리나라 선수들 또한 M-1글로벌이 주관하는 이 M-1챌린지에 꾸준히 출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내 격투 팬들이 M-1글로벌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습니다. 바딤이 표도르의 계약 조건을 가지고 중간에서 장난을 친다거나, 이미 폐업한 어플릭션에서도 그랬고, 현재 UFC의 대항마로 부상할 수 있는 스트라이크포스에 있어서도 M-1글로벌이 도움이 되지 않는 불안 요소라고 보는 시선이 강하기 때문이죠.
특히 표도르를 놓고UFC와 벌였던 협상이나, 어플릭션 폐업, 최근 스트라이크포스 4월대회 출전 불발 등 일련의 사건(?)들은국내 팬들 사이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주제에 표도르를 미끼로 미국 단체들에게 얹혀가면서 단물만 빼먹으려는 기생충 같은 짓거리'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습니다.
표도르가 UFC에 진출해야만 성사될 것으로 보이는 표도르 vs 랜디 커투어, 표도르 vs 브록 레스너 등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빅매치들이 바딤의 '뻘짓'으로 무산됐고, 어플릭션이 폐업 후에도 M-1글로벌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당한 사실, 현재 스트라이크포스의 수익구조에 있어서도 M-1글로벌의 요구 조건이 큰 부담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이런 시선도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더구나 이로 인해 표도르도 끊임없이 '거품론'이나 '검증론'에 시달리고 있고, 최근에는 '이제 표도르도 배가 불렀구나.'라는 식의 비난마저 나오고 있는 상황은 표도르를 믿고 응원하는 팬 입장에서는 결코 달가울 수 없는 일이죠. 특히 표도르도 이제 3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에 그의 격투가로서 신체 능력 저하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가 서둘러 세계 최고의 무대라고 불리는 UFC에서 정점을 찍어주기를 바라는 것 또한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바람이겠죠.
그러나 지금의 표도르는 단순히 한 사람의 격투가에 불과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레드데빌스포츠클럽에서 러시아, 네덜란드는 물론 주변 동유럽 국가 출신의 수많은 후배 격투가들을 육성하고 있고, 나아가 M-1글로벌이라는 전세계를 아우르는 거대 격투기 리그를 등에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을 표도르는 뛰어난 사업가이자 같은 우크라이나 태생인 바딤과 함께 하고 있으며 그에게 보이는 신뢰 또한 상당합니다. 동생 알렉산더가 바딤과 형의 관계에 대한 불만을 나타냈을 때도 "걔가 뭘 잘 몰라서"라고 일축했을 정도니까요. (바딤이란 인물과 표도르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동기님의 딴지일보 칼럼에 비교적 상세히 소개되어 있으니 따로 쓰지 않고 링크로 대체하겠습니다.
http://www.ddanzi.com/ddanzi/section/club.php?slid=news&bno=966 )
물론 표도르가 가진 실력 있는 격투가의 모습을 응원하고 기대하는 팬의 입장에서는 이런 표도르와 바딤의 사업가적 행보가 결코 반가울 수는 없겠습니다만, (사실 저도 지난 4월대회 출전 불발 건에서는 좀 실망했습니다.) 표도르 입장에서 따져보면, UFC에 진출한들 당장 대단한 성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기껏해야 개인 수입이 좀(어쩌면 상당히 또는 매우) 늘어날 테고, 팬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기억에 남을, 또한 한 사람의 격투가 인생에 있어서도 큰 점을 찍을 수 있는 명승부를 두어번 치를 가능성이 열리겠죠. 표도르가 한 명의 프로격투가로서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위치에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은 없을 테지만, 이미 표도르는 더 큰 그림을 그리며 멀리 내다보는 것은 아닐까요. (앞서 언급한 격투 능력의 노화라는 점을 생각해봐도 이 편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 개인적으로는 표도르가 어떤 길을 가든 UFC나 스트라이크포스와 M-1글로벌이 어떤 식으로 결론을 내든 어차피 남의 집 잔치인지라, 가타부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M-1글로벌이 우리 한국 MMA에 무엇을 줄 수 있는가이고, 그렇게 봤을 때 M-1글로벌은 MMA계의 기생충이기는 커녕, 오히려 자선 단체에 가깝습니다.
적어도 M-1글로벌이 주관하는 M-1챌린지는 우리 선수들에게 다양한 해외 선수들을 상대하면서 자기 기량을 시험해볼 소중한 기회를 제공해주는 무척이나 유용하고 고마운 대회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국내 리그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최근 몇몇 MMA 후발국가들이 한국 선수들을 불러들이는 경우가 늘어나긴 했지만,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우리 선수들의 해외 진출 무대는 일본과 미국에 치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일본 단체들은 자국 선수들을 위한 매치업을 우선하며 이를 위한 수단으로 한국 선수들을 부르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기 때문에 단발성/소모성 매치업이 많았으며 때로는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점이 크게 바뀔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죠. 때문에 일본은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거나 기량 향상을 위한 체계적인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는 무대로서는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는 해도, 지금까지 확보된 루트가 많고 우리 선수들이 상대적으로 부담없이 도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포기할 수 없는 무대임에는 분명하지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단체들의 경우, 실력 본위의 대회 운영과 다양한 인종의 선수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전하기에 좋은 무대임은 분명하지만, 상대적으로 공인된 실적이 부족하고 언어나 문화적 차이도 심한 우리 선수들이 쉽게 도전할 기회를 얻기가 아직은 쉽지 않습니다. 또, 비자나 이동 및 체류 비용 등 고려해야할 현실적 문제들은 일본 무대와는 또 다른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최근 전문 에이전트들이 한국 선수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으므로 차차 극복될 문제이지만, 서구 무대는 어떤 별도의 전략적 지원이나 투자가 없는 한 어느 정도 실적을 쌓은 후 대형 단체에 도전할 수 밖에 없다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도전할 자격, 즉 실력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 척도인 선수로서의 커리어'가 필요한데, 지금 우리 선수들에게는 이를 쌓을 기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가장 원초적인 문제가 남아있는 것이죠.
이에 비해 M-1챌린지는 일단 리그에 올라가면 1년에 적어도 4~5회의 안정적인 경기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뿐더러, 미국과 일본, 러시아, 브라질이라는 격투계의 강국들을 포함한 다양한 해외 선수들을 상대하며 그들의 신체 능력이나 격투 스타일을 접해보는 흔치않은 경험도 쌓을 수 있을 뿐 더러, 그 결과를 통해 현재 우리 선수들의 수준이나 장단점을 가늠해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선수들이나 지도진의 인식 개선이나 실력 향상에 직간접적으로 큰 도움이 되는, 다른 어떤 격투 리그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이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개중에 눈에 띄는 선수들은 M-1브레이크스루라는 중간급 이벤트에 출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출전한 경기는 미주 지역의 HD-NET과 우리나라의 SBS스포츠를 비롯해 주요 참가국의 방송을 통해 팬들과 관계자들에게 보여지죠. 결과적으로 선수 개인이나 일개 팀으로서는 쉽게 시도조차 할 수 없는 PR과 상위 무대로의 진출 역시 가능한 것이죠. 에이전트의 입장에서도 TV에서 볼 수 있는 선수가 홍보하기에 유리함은 명백한 일입니다. 심지어 선수를 계약으로 묶는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 느슨해서 리그 중간에 선수들이 다른 대회에 나갈 기회가 생기면 냉큼 빠져나가기도 합니다.) 실제로 최근 UFC에 출전한 루시오 리냐레스 등 몇몇 M-1챌린지를 통해 활약했던 선수들이 더 큰 무대로 진출하는 기회를 얻는 사례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한가지 문제점이라면 선수들 간에 수준 차이가 극심할 때가 있어 정확한 수준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인데요. 국가 별 MMA 수준에 따라서, 또는 그 때 그 때 선수를 수급하다보니 생기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년 미국 동부팀의 경우, 리그 후반으로 갈수록 브라질 선수들의 영입이 극심하게 늘었죠.) 올해부터는 그런 점을 개선하기 위해 국가/대륙별 예선이라고 할 수 있는 M-1셀렉션이라는 하부 대회를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러시아에서는 처음부터 이 셀렉션 대회를 통해 선수를 선발해 팀을 구성했고, 그 결과 2년 연속 우승이라는 성과를 거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이런 결과를 놓고 봤을 때, 결국 M-1챌린지도 러시아 선수들, 특히 레드데빌이라는 소유 팀의 몸값을 올리기 위한 쇼케이스성 이벤트가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M-1글로벌이 너무 큰 출혈과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일단 세계 각국을 돌면서 대회를 개최합니다. 이것은 매 대회마다 예상 불가능한 변수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런 상황 속에서 일차적으로는 선수들의 출입국 문제부터 필수 스태프들과 장비의 이동, 현지 흥행을 위한 투자 유치, 해외로의 중계방송 등등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엄청나게 복잡하고 다양하게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로는 위성생중계로까지 진행되는 국제 대회를 예고된 스케줄과 내용대로 차질 없이 운영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비용과 신뢰 관계를 필요로 하는 일이고, 사실상 도박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M-1글로벌은 지금까지 큰 사고 없이 (때때로 대회 일시가 연기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M-1챌린지, 그리고 M-1브레이크스루 등의 이벤트를 치러왔습니다. 또한 올해도 각 지역별 M-1셀렉션 대회를 시작으로 착실히 리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선수들(뿐만 전세계의 기회를 얻고자 하는 숨은 도전자들 모두)는 올 한 해도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M-1글로벌은 지금까지 한국 선수들에게 우호적이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작년 M-1챌린지 결승전에서는 굳이 한국 선수들을 수퍼파이트로 불러 가기도 했죠. 물론 여러가지 이해 관계가 얽혀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우리 선수들에게 한 번이라도 더 기회를 주는 국제적인 단체가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