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MBC ESPN 주간 격투기 매거진 프로그램 'RINGSIDE' 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당시 K-1 중계와 서울대회 개최 등으로 한창 격투기 붐을 이끌어 가던 MBC ESPN에서 야심차게 시작했던 매거진 프로그램이었지요. 반응도 꽤 좋았었습니다만, 아쉽게도 장수 프로그램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거기서 격투주가, 격투예보 등의 고정코너를 맡고 있었는데,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 제작진과 첫 미팅을 가졌을 때의 일입니다.
진행을 맡았던 정우영 캐스터(가운데)와 이동기 해설위원(오른쪽), 그리고 '자칭' 미녀리포터 김보라 리포터(왼쪽)
실제 격투기 경험이 전무한 담당 작가 두 분과 리포터 한 분으로부터
"선수 이름은 외울 수 있고, 기술 이름이 뭔지는 찾아보고 공부하면 되겠는데요. 뭐가 좋은 기술이고 어떤 장면이 명장면이고 어떤 경기가 명승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격투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보는 눈을 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는 질문을 받고 언뜻 떠오르는 생각에 반농담처럼 다음과 같이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맞을 때의 쾌감과 때릴 때의 두려움을 알아야 한다." 라고요.
그 자리에서는 제가 구체적으로 설명을 못해서인지 우스개 소리에 거의 변태 취급을 당했습니다... -_-;;;;
그런데 느닷없이 나온 말이지만 곰곰이 곱씹어볼 수록 제가 생각해도 꽤 절묘한 표현이 아닌가 싶더군요. ^^
먼저, 단순히 자신이 강해지기 위해서, 이기기 위해서 기술을 익히고 단련을 힐 때는 내가 질 때를 생각하면 두려워지고, 때문에 오히려 싸울 자신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기격을 할 때에도 자신이 공격할 때는 언제나 상대의 반격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 이것을 인지하고 늘 경계하게 되는 것이 바로 때리는 두려움이 아닐까 하는데요. 이것을 잘 극복하면 빈틈 없고 냉정한 기술을 펼칠 수 있는 것이고 그러지 못할 때는 자기 페이스를 잃고 허점을 보이게 되겠지요.
한편, 오히려 맞는 것이 즐거움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왠지 매저키즘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_-) 흔히 얘기하는 '완벽하게 패하면 오히려 기분 좋게 납득하고만다.'는 말이나 지는 것을 두려워 말아라'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인데요. 처음 기술 하나하나를 배울 때부터 급기야 대련에서 기술을 시험해볼 때에 이르기까지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그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게 되는 순간이 있지요.
합기 고수의 술기를 받으며 나가떨어질 때 '아, 이것이 완벽한 기술이구나'라고 감탄하게 되고, 가라테나 무에타이 고수의 로킥에 허벅지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와, 이게 진짜 로킥이구나.'라고 감탄하게 되는 그 느낌! 이건 정말 아는 사람만 아는 묘한 쾌감이죠.
상대의 실력을 존경하고, 내 실력이 이만큼 모자라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 때부터 맞는 것은 더 이상 그냥 맞는 것이 아니고 그조차도 하나의 공부가 된다고나 할까요. 그 순간의 고통, 그 순간의 패배는 그대로 나의 성장으로 이어진단 걸 알기 때문입니다. 이 쯤 되면 급기야는 브라질유술가나 서브미션 레슬러에게 꺾이면서도 '봐주지 말고 진짜로 꺾어줘 봐'라고 요구하게 되지요.;; 왜? 아프더라도, 상대 기술을 조금이라도 더 100%에 가깝게 느껴보고 싶기 때문에! (그래서 옛날 선생님들은 곡 '맞아봐야 안다', '꺾여봐야 안다'라고 하셨는지도... -_-)
그런데, 이 맞는 즐거움은 의외로 마약 같은 데가 있어서, 그냥 당하고만 있어도 자기 실력까지 올라간다고 착각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위 실력 좋은 지도자나 강하다고 소문난 종목의 수련생 사이에서 흔히 보이는 경우죠. 그리고 맞는 즐거움에 빠져들어서 맞는 것이 버릇이 되거나 아예 '으악새' 전용의 시범맨이 되는 것도 곤란하겠지요.
설마 그런 걸 즐기는 사람이 있을까 싶겠지만, 의외로 꽤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때리는 두려움을 끝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약간 삐딱하게 빠져버린 경우죠. 즉, 자기 자신이 강해질 생각이나 자신감을 가지지 못한 채, 나는 여기서 만족해, 좋은 기술 받으면서 공부나 하면 되지 뭐.. 라고 자기합리화를 한달까요.
때리는 두려움과 맞는 즐거움... 모두 그 자체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나 반드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극복해냈을 때 자신과 상대를 가감 없이 볼 수 있음으로써 더 강해질 수 있는 과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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