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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90년대 후반 즈음 어느 대회에서의 부상을 이유로 합기도 계열 대회들마다 우후죽순 앉아돌려차기가 금지됐던 때가 있었죠. 이유는 '위험해서'. 좀 더 파고 들어가보니 "요즘 애들이 1. 앉아돌려차기 자세나 힘이 안 좋아서 다리가 꼬이는 경우가 많고, 2. 낙법도 잘 못해서 다치는 경우가 많다"라는 겁니다. 잘 이해가 안 갔었습니다. 그럼 경기에서 기술을 뺄 게 아니라, 예전처럼 기술을 써도 다치지 않게 기술을 다듬고 낙법을 더 연습하도록 시켜야 할 문제 아닐까 싶어서 말이죠. 실제로 그 결과로 지금 합기도 경기의 경기력이 더 나아졌다거나 부상 빈도가 줄긴 했을까요?


로드FC가 오는 5월 2일 대회부터 팔꿈치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걸로 룰을 바꿨습니다. 듣자 하니 두 번 정도 팔꿈치를 사용하는 룰을 채택했다가, 최근 권아솔 vs 이광희 전에서 팔꿈치 사용에 따른 문제들이 생기자 번복한 모양인데요.





로드FC 1회 대회 때 심판위원장이 저였고, 초기 룰도 제가 만들었습니다. 당시 정문홍 대표는 UFC 룰과 동일하게 팔꿈치를 넣고 싶어했고, 반면 선수나 팀들은 그 때까지만 해도 팔꿈치 기술 미비와 컷에 대한 부담 때문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지요. 결국 선수들이 팔꿈치를 선택할 수있는 절충안으로 가닥을 잡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후에 룰 변화가 어찌 됐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1회 대회 끝나고 주최측이 더 이상 연락을 안 하더라고요.ㅎ) 


어쨌든, 어떤 룰을 채택할 때 주최 측은 그 룰의 목적과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룰로 인해 예상할 수 있는 결과에 대해 관리 책임을 제대로 져야 합니다. 선수 안전을 최우선으로 경기력 향상, 방송 및 관중 흥행 등의 요소를 고려해서 충분히 준비가 되어있을 때 룰을 채택해야 하는 것이고, 그 예상 범주를 벗어난 결과가 나왔을 때는 역시 그런 요소들이 최선의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개선해나가야 합니다. 


팔꿈치는 컷을 전제로 하는 기술이죠. 팔꿈치 사용을 채택했다면 그 시점에서 컷에 대한 명확한 대비가 되어있었어야 합니다. ① 컷을 지혈할 수 있는 최선의 노하우를 갖추든지, ② 흥행에 관계 없이 지혈할 수 없는 컷이 나는 순간 닥터스톱으로 경기를 중단하거나 (그리고 그 시점에서 판정은 어떻게 내릴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도 있어야 하고) ③ 또는 반대로 흥행이나 방송에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피바다 씬을 만들면서까지 승부를 볼 각오를 하든지. 


1회 대회 준비 때 저는 팔꿈치 룰이 가지고 올 예상 결과를 전달했고, 정문홍 대표는 3번을 택했었습니다. 모든 책임은 본인이 지겠다고 했었지요. 결국 일반적인 바셀린 도포 및 압박 정도로 지혈이 되지 않는 등의 부상일 경우 무조건 닥터스톱을 내릴 것을 심판단 내부 지침으로 삼고 팔꿈치 선택 룰 도입을 적용했습니다. 


제가 당시 팔꿈치 룰 도입에 반대하지 않았던 것은 당시 이미 UFC가 대세로 자리잡고 있던 시점에서 분명히 팔꿈치 기술이 선수들에게 필요한 요소이긴 했고, 대표의 뜻이 어떻든 안전 측면에서 선수가 컷에 대한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②라는 옵션을 최대한 강하게 적용하겠다는 나름의 대비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결국, 당시 실제로 팔꿈치를 선택한 선수는 아무도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일정 크기 이상의 컷이 생겼을 때 최선의 답은 스톱입니다. 심지어 태국 무에타이 경기에서도 컷이 나고 지혈이 안 되면 경기 내용이나 흐름과 관계없이 경기를 끝내죠. 매 라운드 큰 돈이 오가는 도박판인데도 그렇습니다. (물론 일단 지혈만 되면 선수가 의지를 보이는 한 경기를 속개시키기는 합니다.) 


UFC가 출혈이 시작됐어도 경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일단 이어지는 경기 흐름에 대한 외부 개입을 최소화한다는 발리투도 기반의 더 큰 원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승부에 대한 개념이 다른 거죠. 그래도 일단 흐름이 끊기고, 레퍼리와 닥터가 개입을 한 시점에서 지혈이 안 되면 역시 스톱입니다. (근데 보통 여기서 대부분 어쨌거나 지혈은 한다는 게 전문 커트맨의 능력. 툭 건드리기만 해도 다시 터지긴 할지언정 -_-)





출혈이 멈추지 않는데 붕대를 감아서까지 경기를 속행시키는 기괴한 모습은 우리나라 MMA씬에서만 보이는 진풍경입니다. (과거 네오파이트가 몹쓸 전례를 남기는 바람에... -_-) "붕대 투혼"이라는 요상한 말장난으로 부상에 대한 모든 부담은 선수에게 떠넘기면서 그 알량한 '난타전', '대혈전'이나 만들어 보겠다니... 


그리고는 판정도 오락가락하다가 이제 기껏 도입한 룰을 겨우 2회만에 취소한다니, 정말 책임감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 번 도입한 룰을 이렇게 쉽게 취소하면 그 룰을 다시 적용하는 것은 그만큼 더 어려워지게 마련입니다. 정말로 대회와 선수의 미래를 생각하고 팔꿈치에 대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히려 앞으로 컷 등 부상에 대한 (의료적으로나 경기 운영 및 판정을 포함한) 처리 방식을 고민하면서 뚝심있게 팔꿈치를 고집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번 조치를 주최 측의 선수 안전을 위한 빠른 대응이란 식으로 긍정적으로 봐줄 사람이 많을지, 아니면 능력부족을 면피하려한다는 부정적 반응이 많을지 궁금합니다. 제 생각에는 선수들의 기술력 하락, 대회의 경기력 퇴보 뿐 아니라, 주최 측이 선수들에게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데 따른 신뢰의 추락도 불러올 것입니다. 대응 방식은 제대로 준비도 안 되어있었는데, 막상 해보니 위험 부담이 커서 일단 코앞의 문제만 피하고 보겠다는 알량한 심보가 선수를 흥행을 위한 도구로만 보는 게 아니냐는 얘기나 안 들으면 다행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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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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