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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老將)은 죽지 않는다.

종로 장산곶매와 경기대학교 아리쇠의 경기가 다가왔다. 흰 바탕의 옷에 등에 시원스럽게 새겨진 멋진 매의 모습이 돋보이는 장산곶매 팀이 마치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매처럼 등장했고 뒤이어 노란색 겉옷을 입은 아리쇠가 대조적으로 덤덤하게 등장해 경기장을 채웠다.

경기 전의 예상은 기량이 갈수록 붙고 있는, 동면에서 깨어난 날쌘 곰 이하람과 날카로운 야옹이 김현호, 암사자 이건희 등 동물농장(그것도 무시무시한)을 만들어버린 이영훈 선생의 스카웃이 빛을 발한 장산곶매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반면 아리쇠는 노장들의 체력문제, 겨울동안 다량의 탄수화물과 지방질을 섭취한 김성용의 체중증가로 인해 불리하다고 평가되었는데 더구나 감독님까지 오늘 부재한 상황이었다. 과연 어떻게 흘러갈지 귀추가 주목......되지는 않았다. 명약관화(明若觀火)라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쓰는 말이었으니까.

풍악이 울리며 이에 맞춰 청팀인 장산곶매에서 선수가 출전했다. 예상외로 이하람이 먼저 출전을 해서 의아했지만 생각해보면 김현호, 이건희가 있으니 이하람이 선봉으로 출전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는 배치였다. 보통 장기는 졸(卒)부터 출격하는데 장산곶매의 졸은 졸의 탈을 뒤집어쓴 차(車)가 나와 버렸다. 이에 맞서 아리쇠는 김상준 선수가 나왔다. 상대적으로 큰 이하람을 맞아 발질 위주로 공격을 하리라는 예상을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하람의 기습적인 곁차기에 김상준은 당해버리고 말았다.

이어 출전한 아리쇠의 선수는 김상일. 작년에는 새신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선수로 키가 크고 훤칠한, 발길질을 잘 쓰겠다고 보이는 선수였다. 이하람이 예상 외로 곁차기를 잘 썼지만 아무래도 길이에서 차이가 날 듯하다. 예상대로 김상일 선수는 이하람의 덜미잽이에서 이어지는 곁차기를 잘 견제하며 경기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그 틈을 파고든 것일까, 갑자기 이하람은 날렵하게 김상일의 오른쪽 오금을 양손으로 잡고 뽑아 올리더니 그를 바닥에 내팽개쳐버렸다. 곁차기와 아랫발질을 너무 생각했던 것일까, 순간적인 오금잽이를 당해내지 못하고 말았다.

기세가 오른 장산곶매를 상대할 아리쇠의 선수는 윤성군이 등장했다. 원조 짐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그가 과연 장산곶매의 기세를 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반반쯤 되지 않을까? 하지만 직장일에 피곤한 비즈니스 맨이 과연 얼마나......라는 생각을 저리 날려버리듯이 짐승은 주특기인 칼잽이와 오금잽이로 날쌘 곰 이하람을 날려버렸다. 장내는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유독 새로운 관중들이 많았는데 신기하게 한 번에 덩치 큰 이하람을 쓰러뜨리는 택견 특유의 늘어짐 없는 태기질이 신선했던 모양이다.

얌전한 본때뵈기로 등장한 장산곶매의 다음 선수는 김선호 선수. 방금 전의 임팩트 있는 끝내기 덕에 기력이 올라간 윤성군을 맞아 견제를 하다가 저돌적인 공격을 들어가는 김선호였으나 역시 노장은 노련했고 윤성군은 그것을 되쳐버리며 김선호를 바닥에 눕히고 2연승을 달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 기세를 둘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영훈 감독은 야옹이 패를 뽑아들었다. 야옹이 패를 배틀장에 던지자 야옹이 패는 김현호라는 날쌘 택견꾼으로 둔갑해 신명나게 본때를 뵈며 몸을 풀었고 날렵해 보이는 그의 움직임에 풍물패는 흥겹게 장단을 맞췄고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며 시선을 집중했다. 야옹이라는 별명답게 김현호는 날쌔게 품을 밟으며 윤성군을 공략하기 시작했고 진중한 윤성군은 앞으로 갈 길을 생각하듯 체력 안배 차원에서 마치 뻘에서 미끄러지듯이 대조적으로 정적인 움직임으로 일관했다. 마치 권투에서 아웃복서와 인파이터 복서가 만났을 때와 같은 상황이 경기장에서 벌어졌고 승부는 뜻밖에 기습적인 후려차기로 김현호의 얼굴을 가격한 윤성군의 승리로 끝났다. 태질로 승부를 낼 것이라는 예상을 시원하게 깨버린 윤성군은 조금 지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고 장산곶매는 승부를 던지려는 듯이 이영훈 감독은 비장한 표정으로 다시 새로운 패, 최강의 패를 꺼내들었다.

그 패는 바로 암사자 패. 야옹이 패로 짐승의 체력을 갉아먹으며 이번 턴을 마감한 뒤 암사자 패로 사냥을 마무리하려는 연속적인 고양이과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암사자 이건희는 시작하자마자 강하게 짐승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장내 아나운서가 말해주는 암사자의 경력은 화려했고 그 경력과 공격하는 패기에 사람들은 이미 승부가 결정이나 난 듯 어떤 멋진 기술이 나올까 궁금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때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아나걸이 응원하거나 소개하는 선수는 꼭 지던데......”

택견배틀의 유명한, 이름하여 ‘아나걸의 저주.’ 그 저주에 희생된 원혼들이 전수관과 동아리에서 울고 있다는 괴소문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저주다. 과연 그럴까......라고 생각했더니......이런......역시 아나걸의 저주는 사실이었다. 시종일관 밀어붙이며 지친기색이 역력한 짐승의 급소를 물려고 달려들던 암사자는 그만 짐승이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어 버렸고 태질로 마무리를 하려는 이건희를 윤성군은 재빠르게 뒤집어버리며 이건희를 바닥에 무릎 꿇려 버렸다. 장내에는 엄청난 환호성이 들끓었다.

강적인 암사자와 맞서 싸우느라 윤성군은 이제 진이 다 빠진 모양이었고 이번에는 조련사이자 마지막 선수인 김용주 선수가 출전했다. 중심이 낮고 노련해서 여간해서는 꼼수에 걸리지 않는 김용주 선수는 비록 장산곶매의 마지막 선수였지만 힘이 다 빠진 짐승을 조롱하듯 본때를 뵈며 윤성군의 바로 앞에서 솟구치는 발길질을 하는 여유를 보였고 보통 짐승들이라면 으르렁 했겠지만 힘이 다 빠진 윤성군은 으르렁댈 힘도 없다는 듯이 축 늘어져 있었다.

지친 윤성군의 주변을 돌며 김용주 선수는 아랫발질로 사정없이 윤성군을 괴롭혔고 체력이 있었다면 오금잽이를 했을 윤성군은 타이밍을 놓치며 점점 김용주 선수에게 말려들어가는 듯 했다. 특기인 오금잽이를 놓치는 모습에 자신감이 붙은 것일까? 힘이 다 빠진 짐승의 목을 잡아 쓰러뜨리려는 듯이 김용주 선수는 짐승을 힘차게 잡아챘다. 그리고 다른 선수들의 몫을 담아 바닥에 짐승을 눕혀버리는......가 싶었는데, 아뿔싸, 이것도 역시 짐승의 함정이었다. 그 순간 앞서 결전에서 보였던 화려한 되치기가 작렬하며 바닥에 누워버린 것은 김용주 선수였다. 와!!!! 하는 엄청난 환호성과 함께 아리쇠 선수들이 펄쩍 뛰며 일어나 윤성군을 들었다. 지쳐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이지만 윤성군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가득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 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 말보다 노장은 죽지 않는다, 화려하게 부활하고야 만다. 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대다수의 예상을 깨고 직장의 스트레스와 체력저하를 뒤집어 승리, 그것도 판쓸이로 상대 팀 다섯을 모조리 쓸어버린 짐승 윤성군. 60전의 경력에 다시 5전, 그것도 모조리 승리가 추가된 그에게는 노장이라는 말 앞에 ‘백전’ 이라는 말을 붙여주어야 할 것 같다. 노장이라 하면 어쩐지 좀 나이 들고 찌들고 약해졌고 하는 감정이 들지만 그 앞에 백전이라는 말이 붙어 백전노장(百戰老將)이 되는 순간 이무기가 여의주를 물어 용이 된 것 같은 포스가 느껴진다.

백전노장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하나 목표를 쌓아나가고 어느덧 정신차려보면 목적을 모두 달성하고야 만다. 마치 만화 더 파이팅에서 주인공 일보가 자신의 체력이 저하되자 라운드마다 상대에게 목표를 설정해 하나씩 쌓아나가 결국 승리했던 그 시합 모습을 오늘 백전노장 윤성군의 경기에서 다시 현실로 보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와 고민 중에 살아간다. 산전, 수전, 공중전에 화생방전도 겪는다고 할 정도로 현대 사회는 노장들의 사회인지도 모른다. 또 그런 상황에 많은 이들이 안 좋은 방법으로 그 문제들을 풀거나 도피하곤 한다. 그러나 오늘 보여준 윤성군의 경기처럼, 우리 모두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하나하나씩 침착하게 조금씩 달성해 나가보면 어떨까. 그러다가 어느덧 경기에도 승리하고 판쓸이라는 덤까지 얻은 백전노장 윤성군처럼 우리도 우리 이름 앞에 ‘백전’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뿌듯해할 수 있지 않을까.

by 곰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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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ngp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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