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예전에 특공무술 사범을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막 도장에 다니기 시작한 고등학생 삼총사가 있었습니다. 이 녀석들은 저의 실력에 대해서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던지, 아니면 젊은 사범님이라 좀 만만하게 보였던지 곧잘 제 실력을 시험하는 장난을 걸곤 했었는데요.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도장 벽에는 그다지 날이 잘 서지는 않은, 그러나 충분히 위협적인 진검이 몇 자루 걸려있었는데 녀석들 중 하나가 그것을 뽑아들고는 저를 향해 겨누더군요. "사범님, 꼼짝마세요!" 라고 하면서 말이죠.
일단 이 시점에서, 다른 도장 같았으면 이미 반쯤 죽을 때까지 두드려 맞았을 일입니다. 흰띠가 도장에 지도자들이 쓰는 진검을 마음대로 건드린 것도 경을 칠 일인데, 그것을 심지어 사범에게 겨누기까지 했으니 간이 배 밖에 나와도 보통 나온 게 아니지요.
그러나, 하해와도 같은 아량을 가진 훌륭한 지도사범이었던 ^^ 저는 "내려놔라~ 그런 거 사람한테 함부로 겨누는 거 아니다."라고 부드럽게 말로 타일렀습니다. 물론, 그 녀석은 말을 듣지 않았지요. -_-
"저한텐 칼이 있는데요, 어쩌실 거예요." 라는 도발과 함께 쉿쉿거리며 칼을 찌르는 시늉을 하더군요. 장난이긴 했습니다만, 딴에는 꽤 겁을 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막 수업을 마쳤던 시점인지라 그 때 제 손에는 출석부가 들려있었는데요, (출석부래봐야 딸랑 A4 용지 한장 들어있는, 종이로 된 파일이었습니다만... 아시죠? 문방구에서 50원이나 100원에 파는 노란 종이서류철, 그거 말입니다.)
녀석이 "어쩔 거예요"라며 까부는 틈에 출석부로 칼날을 옆으로 비껴 쳐내고 "어쩌긴 뭘 어째, 욘석아. 때려줘야지."라면서 머리를 한 대 찍어주고는 칼을 빼앗았습니다. 그랬더니 "아우~씨, 아니 왜 칼을 안 무서워해요?"라고 징징대더군요. ^^
그 이후로 녀석이 저를 대하는 태도가 좀 바뀐 것을 보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때 녀석들 눈에는 제가 꽤 대단해보였던 모양입니다.
... 만,
제가 왜 칼이 무섭지 않겠습니까. -_- 진검은 그 자체가 매우 위협적이어서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칼을 든 상대 앞에 서기만 해도 심박수가 올라가고 어떻게 움직여야할 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지요.
그런데, 사실 그것은 칼을 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진심으로 사람을 베거나 찌를 생각이 없는 사람이고, 심지어 초보자라면 오히려 그 긴장감은 칼을 든 쪽이 더 심하게 마련입니다. 칼자루를 손에 쥐고 있기는 한데, 그것을 어찌하지 못하고 단지 쥐고만 있을 뿐이고 행여 잘못해서 정말 찌르거나 살짝이라도 베이면 어쩌나 노심초사하게 되지요. (흔히 말하는 '칼이 사람을 잡았다'라고 하는 것이 이런 경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그렇게 손쉽게 녀석을 처리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또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이 녀석들이 저를 놀라게 하려고 도장 문 밖에 숨어 있었나 봅니다. 아마도 제가 문을 나서는 순간 뭔가 공격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겠지요. 저는 문 안 쪽 바로 옆에 앉아서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별 생각 없이 신발을 확인하기 위해서 앉은 채로 머리를 문 밖으로 내밀었더니 바로 옆에 녀석들이 쪼그리고 앉아있는 것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들 거기서 뭐하냐?"라고 한마디 툭 내뱉았지요.
이 녀석들 무지하게 놀라더군요. "아니, 우리가 숨어있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하면서 말이지요.
...
알기는 개뿔, 뭘 압니까. -_-
오비이락,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요. ㅋㅋ
자, 이제 여기서 정리 들어가겠습니다. 첫번째 경우는 전후사정의 속을 알고 보면 별 것 아니지만 모르는 사람이나 초보 시절이었던 녀석들에게는 대단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쨌든 제가 그나마 처리를 했던 첫번째 경우와는 달리 두번째 경우는 사실 그저 우연에 불과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첫번째 일이 있었기 때문에 녀석들 머리 속에서는 이미 두번째 일도 우연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겁니다. 실제로 그 때 아이들이 놀라서 던진 반문에 "알기는 뭘 아냐. 그냥 본 건데."라고 답했습니다만, 아이들은 이미 "우와~ 대단하다. 신기해."라고 되뇌일 뿐 제 대답은 들은 체도 않더군요. -_-a (어쩌면 그 대답조차도 고수의 능청으로 받아들였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ㅋㅋ)
그럼, 이제 녀석들이 이 이야기를 다른 친구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어떻게 될까요?
"내가 예전에 다녔던 도장 사범님은 말이야, 벽 뒤에 숨어있는 사람의 기도 읽어내는 사람이었어. 내가 벽 뒤에 숨어서 앉아 있는데, 바로 아래 쪽에서 튀어나와서 딱 눈을 맞추면서 뭐하냐고 그러더라니까? 얼마나 놀랐던지... 그 뿐인 줄 알아? 칼들고 덤비는 나한테 종이파일 하나로 이기는 고수였어. 샤샥~ 하면서 어느새 칼도 빼앗기고 내 이마에 종이파일이 떨어지는데... 그게 그 양반도 칼을 든 것이었어 봐.. 난 죽었지~. "
뭐 대충 이런 식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왜냐? 이런 얘기가 나오는 상황은 대부분 앞서 다른 사람이 한 얘기보다 더 대단한 무언가를 이야기해야할 분위기라 얘기를 그럴 듯 하게 꾸미거나 부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두 다리 건너가다 보면, 어느새 저는 초절정 절세고수가 되어있겠지요. ^^
칼 사건이 있던 날 집으로 가는 길에 "이런 식으로 전설이 생기는 거구나." 싶더군요. 그리고, 이후 몇가지 우연과 당하거나 보는 입장에서의 자의적 해석이 겹치면 더더욱 그에 대한 확신이 굳어지고 마는 것일 테고요. 그 전에도 저는 썩 그런 전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편은 아니었습니다만, 이후로는 확실히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로 보게 되더군요.
물론, 그렇다고 그런 무용담들을 숫제 부정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잘 생각해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의외로 수련에 도움이 되는 힌트를 찾아내고 무릎을 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게다가 무용담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자랑' 혹은 '칭송'의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리 객관적으로 얘기하려 해도 과장이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도 사실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사실 어떤 이야기든 간단한 과장이나 비유는 자연스럽게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고요.
말하자면 요즘 여학생들이 핸드폰 문자를 분당 300타의 속도로 보내는 걸 보면서 "손이 안 보인다" 내지는 "손가락이 수십개는 되는 것 같다"라고 표현하는 거나 카오클라이나 레미 본야스키 같은 선수들이 플라잉킥을 구사할 때 "야~ 아주 날아다니는구나, 날아다녀."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나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런데 그걸 " 정말로 날아다닌대"라고 받아들인다면 그 쪽이 비상식적인 것 아닐까요? ^^